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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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은 1993년 자유민주당의 분열과 총선 참패 이후, 자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8개 정당이 연립하여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을 시작으로, 1994년 하타 내각을 거쳐 2009년 민주당 정권 교체 전까지 이어진 일본 정치의 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여당 대표자 회의의 문제점, 소비세 문제 등으로 연립정권 내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2009년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간 나오토 내각, 노다 요시히코 내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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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 |
---|---|
개요 | |
명칭 |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
로마자 표기 | Hijimin-Hikkyōsan Renritsu Seiken |
약칭 | 비자·비공 연립 |
존립 기간 | 1993년 8월 9일 ~ 1994년 6월 30일 (325일) |
주도 세력 | |
중심 정당 | 일본사회당 |
참여 정당 | 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주사회당 선구신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
주요 인물 | |
총리 |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년 8월 9일 ~ 1994년 4월 28일) 하타 쓰토무 (1994년 4월 28일 ~ 1994년 6월 30일) |
배경 | |
이전 정부 | 미야자와 내각 |
성립 계기 | 자유민주당의 분열 및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 결의 |
해산 사유 | 일본사회당의 이탈 및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신생당의 대연립 구상 |
특징 | |
정치적 성향 | 탈 자유민주당 (비자민), 반 일본공산당 (비공산) |
목표 |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 체제 종식 및 정치 개혁 |
주요 정책 | 정치 개혁 관련 법안 추진, 소선거구제 도입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자유민주당의 독점적 지배 체제 종식에 기여, 정치 개혁의 발판 마련 |
부정적 평가 | 정권 운영의 불안정성, 정책 혼선, 단명 정권으로 인한 한계 |
2. 최초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출범까지 (1993년)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자유민주당은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1] 그러나 비자민당 계열 정당들의 의석 수를 모두 합치면 과반을 넘는다는 것을 파악한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는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과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들어갔다.[1] 1993년 7월 29일, 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대표들은 회담을 통해 연립정부 수립에 합의했다.[1] 그 결과, 8월 9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면서 자유민주당은 38년 만에 여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1.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과 중의원 해산
1993년 6월 18일, 자유민주당 내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그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당내 하타 파(개혁포럼21)와 비주류파의 이탈 속에 가결되어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졌다. 이는 '거짓말쟁이 해산'이라고 불린다.[1] 자유민주당은 당내 분열로 하타 파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가 각각 당을 탈당해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였다.[1]2. 2. 자민당 분열과 신당 창당
1993년 6월 18일, 자유민주당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그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당내 계파인 하타 파(개혁포럼21)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의 이탈 속에 가결되어 중의원 해산(거짓말쟁이 해산)과 함께 총선거가 예정되었다. 자유민주당은 당내 분열로 인해 하타 파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가 탈당하여 각각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면서 분열되었다.[1]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지난 총선에 비해 52석을 잃으며 참패(223석)하여 단독 과반을 상실하였다. 한편,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총선에서 비교적 선전하며 일본신당과 함께 '''신당 붐'''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변을 일으켰다.[1]
2. 3.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신당 붐
1993년 6월 18일, 자유민주당 내 하타 파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가 탈당하여 각각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면서 자민당은 분열되었다.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이전 총선보다 52석을 잃는 참패(223석)를 겪으며 단독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한편,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선전하였고, 일본신당과 함께 '신당 붐'이라 불리는 이변을 일으켰다.2. 4. 비자민당 연립정권 협상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후, 자유민주당은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1] 그러나 비자민당 계열 정당들의 의석 수를 모두 합치면 과반을 넘는다는 것을 파악한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는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과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들어갔다.[1]1993년 7월 29일, 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대표들은 회담을 통해 연립정부 수립에 합의했다.[1]
2. 5. 호소카와 내각 출범
1993년 6월 18일, 자유민주당 내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당내 하타 파(개혁포럼21) 등의 이탈로 가결되면서 중의원이 해산되고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유민주당은 당내 분열로 하타 파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가 탈당하여 각각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창당하였다.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52석을 잃는 참패를 겪고 단독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신생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일본신당과 함께 이른바 '신당 붐'을 일으키며 선전했다.총선 후, 자유민주당은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오자와 이치로 신생당 대표 간사를 중심으로 비자민당 계열 정당들이 연합하여 과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연립정부 구성 협의가 진행되었다. 7월 29일, 일본사회당(70석), 신생당(55석), 공명당(51석), 일본신당(35석), 민사당(15석), 신당 사키가케(13석), 사회민주연합(4석), 민주개혁연합(참의원) 대표들이 회담을 갖고 연립정부 수립에 합의했다. 8월 9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대표가 총리로 지명되면서 자유민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8개 정당 연립 내각인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자유민주당은 1955년 이후 38년간 유지해 온 여당 지위를 잃고 야당으로 전락했다.
3. 연립 여당의 정권 운영 (1993년~1994년)
호소카와 내각은 8개 연립 여당 내 의견 조율 및 정치 결정을 위해 내각 내에 연립 5개 정당의 간사장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정치개혁 법안 내용의 조정과 증세 및 감세 등 주요 정책 결정, 예산안 편성 시기 조율 등 중요 정치 일정의 협의 및 결정 기능이 지나치게 여당 대표자 회의에 집중되면서, 국무회의보다 위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연립 여당 사이에 불만과 분열을 초래했다.[1]
일본사회당과 오자와 이치로 간의 갈등이 선거제 개혁이나 소비세 문제 등으로 심화되면서 연립정부의 파열음이 울렸다. 호소카와 총리는 연립 여당과의 논의도 없이 국민 소비세 도입을 발표하는 등 국정 운영에 혼란을 가중시켰다.[1] 결국 1994년 4월 호소카와 총리는 정국 혼란과 사가와규빈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을 총사퇴시켰다.[1] 연립 여당은 신생당 대표 하타 쓰토무를 차기 총리로 지명하여 하타 내각을 구성했으나,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정부에서 이탈하며 2개월 만에 붕괴되었다.[1]
자유민주당은 이 틈을 타 정권 회복을 노리고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이탈한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손을 잡고 일본사회당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지명, 무라야마 내각을 구성하며 여당 지위에 복귀했다. 이로써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은 10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1]
3. 1. 여당 대표자 회의의 문제점
호소카와 내각은 연립 여당 간의 의견 조율과 정치적 결정을 위해 내각 내에 5개 정당의 간사장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설치했다. 그러나 정치개혁 법안 내용 조정, 증세 및 감세 등 주요 정책 결정, 예산안 편성 시기 조율 등 중요한 정치 일정 협의 및 결정 기능이 여당 대표자 회의에 지나치게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보다 위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연립 여당 사이에서 제기되며 분열을 초래했다.일본사회당과 오자와 이치로 간의 갈등이 소비세 문제, 선거제 개혁 등으로 심화되면서 연립정부의 파열음이 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연립 여당과의 논의 없이 국민 소비세 도입을 발표하는 등 국정 운영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3. 2. 연립정권 내부 갈등 심화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은 연립 여당 간 의견 조율을 위해 내각 내에 5개 정당의 간사장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정치개혁 법안, 증세 및 감세 등 주요 정책 결정과 예산안 편성 시기 조율 등 중요 정치 일정을 주도하면서 국무회의보다 위에 있다는 비판과 함께 연립 여당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다.[1]특히, 선거제 개혁과 소비세 문제 등을 놓고 일본사회당과 오자와 이치로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연립정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호소카와 총리가 연립 여당과의 사전 논의 없이 국민복지세 도입을 발표하는 등 국정 운영에 혼란을 더했다.[1] 이러한 상황은 1994년 4월 호소카와 총리가 사가와규빈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
3. 3. 호소카와 내각 총사퇴와 하타 내각 출범
호소카와 내각은 연립 여당 내 의견 조율 및 정치 결정을 위해 내각 내에 연립 5개 정당의 간사장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정치개혁 법안 내용의 조정과 증감세 등 주요 정책 결정, 예산안 편성 시기 조율 등 중요 정치 일정의 협의와 결정 기능이 지나치게 여당 대표자 회의에 집중되면서, 오히려 국무회의보다 위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연립 여당 사이에 불만과 분열을 초래했다.[1]1994년 4월, 선거제 개혁이나 소비세 문제 등으로 일본사회당과 오자와 이치로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호소카와 총리는 연립 여당과의 논의도 없이 국민복지세 도입을 발표하는 등 국정 운영에 혼란을 가중시켰다.[1][2] 결국 호소카와 총리는 정국 혼란과 사가와규빈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을 총사퇴시킨다.[1] 이후 연립 여당은 신생당 대표 하타 쓰토무를 차기 총리로 지명하여 하타 내각을 구성, 연립정부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정부 구성에서 이탈하며 하타 내각은 2개월 만에 붕괴된다.[1][2]
4. 자민당의 여당 복귀와 무라야마 내각 출범 (1994년)
(소스에 내용이 없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5. 그 후: 비자민·비공산 세력의 재편과 민주당 정권 교체 (1994년~2012년)
1994년 하타 내각이 붕괴한 이후에도 비자민·비공산 세력은 신진당, 1998년 민주당을 구성하며 자민당에 대항했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단독 과반(308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며 1994년 이후 첫 정권 교체에 성공, 사회민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이 민주·사회·국민 연립정권 역시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1]
5. 1. 신진당과 민주당 창당
하타 내각 붕괴 이후, 비자민·비공산 세력은 자유민주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4년 신진당을 창당했다. 1998년에는 민주당을 창당했다.[1]5. 2. 2009년 민주당 정권 교체
2009년 민주당은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단독 과반수인 308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며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1] 이는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과 변화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결과였다. 민주당은 사회민주당, 국민신당과 연립정부를 출범시켰으며(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이 민주·사회·국민 연립정권 역시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1]5. 3. 민주·사회·국민 연립정권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2009년 민주당이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단독 과반(308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며 1994년 이후 첫 정권 교체에 성공, 사회민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이 민사국 연립 정권 역시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1]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고, 사회민주당, 국민신당과 함께 연립 정권(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을 탄생시켰다. 이 민사국 연립 정권(이후 사민당이 이탈하여 민국 연립 정권)은 비자민·비공산 정당에 의한 연립 정권이지만, 자민당, 공산당 이외에 공명당, 모두의 당, 일본 유신회도 민주당 정권에 대해 야당 입장을 취했다.[2]
5. 4. 민국 연립 정권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내각)
민주당은 2009년(헤이세이 21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압승하여, 사회민주당, 국민신당과 함께 연립 정권(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을 탄생시켰다. 사회민주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이후에도 민주당은 국민신당과 연립 정권을 유지했다. (\[\[간 나오토 내각]], \[\[노다 요시히코 내각]]) 이 \[\[민국 연립 정권]]도 비자민·비공산 정당에 의한 연립 정권이지만, 자민당, 공산당 이외에 공명당, 모두의 당, 일본 유신회도 민주당 정권에 대해 야당 입장을 취했다. \[\[간 나오토 내각]]은 동일본 대지진 수습에 주력했으며,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중의원 해산 이후 총선에서 자민당에 패배하며 민주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6. 비자민·비공산 정권 시기 역대 내각총리대신
대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주요 정책 및 사건 | 여당 | 야당 | |
---|---|---|---|---|---|---|
79 | ![]() | 호소카와 모리히로 | 1993년 8월 9일 ~ 1994년 4월 28일 | 일본신당 대표로서 8개 정당 연립 정권의 수반으로 지명되어 55년 체제를 종식시켰다.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선거 제도를 변경했다.[1] | 일본신당, 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 자유민주당, 일본공산당 |
80 | -- | 하타 쓰토무 | 1994년 4월 28일 ~ 1994년 6월 30일 |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사임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일본사회당의 연립 이탈로 소수 여당 정권이 되었다.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로 총사퇴하고 자유민주당이 정권에 복귀했다.[1] | 신생당, 일본신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각외 협력) 일본사회당 | 자유민주당, 일본공산당, 일본사회당 |
2009-2012 민주·사회·국민 연립 정권 | ||||||
93 | ![]() | 하토야마 유키오 | 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8일 | 민주당 대표로서 자유민주당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단독 과반수를 달성하여 두 번째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어 헤노코 이설 등에 힘썼다.[1] |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신당 | 자유민주당, 공명당, 일본공산당, 모두의 당, 신당 일본, 신당 다이치 |
94 | ![]() | 간 나오토 | 2010년 6월 8일 ~ 2011년 9월 2일 |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하토야마 유키오의 후임으로 지명되어 총리대신이 되었다.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에 참패하여 여당 연합이 야당보다 적어지는 국회 교착 상태를 초래했다. 이듬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부흥을 담당했다.[1] | 민주당, 국민신당 | 자유민주당, 공명당, 일본공산당, 모두의 당, 신당 일본, 신당 다이치, 사회민주당, 일어서는 일본, 신당 개혁 |
95 | ![]() | 노다 요시히코 | 2011년 9월 2일 ~ 2012년 12월 26일 |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총사퇴한 간 나오토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2012년 당수 토론에서 중의원 해산·총선거를 표명했고, 그 결과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에 대패했다. 참의원 선거에 의한 국회 교착 상태는 해소되었으며, 민주당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1] | 민주당, 국민신당 | 자유민주당, 공명당, 일본공산당, 모두의 당, 신당 일본, 신당 다이치, 사회민주당, 일어서는 일본, 신당 개혁 |
참조
[1]
웹사이트
8党派連立政権樹立への軌跡
https://www2.nhk.or.[...]
[2]
서적
EGenerational Gap in Japanese Politics: A Longitudinal Study of Political Attitudes and Behaviour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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